시니컬한 사설
드립커피에 대한 관심이 생긴 지는 대략 2년쯤 됐을까? 매번 피로한 일상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섭취'했던 나로서는 드립커피는 사치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충분하게 할애해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려서 마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했다. 내 신대원생활과 파트사역자 때는 정말이지 버티기 위한 커피 인생이었다.
드립커피를 제대로 인식하고 마시기 시작한 건 사역 3년차, 어떤 회의를 하기 위해 카페에 갔었는데 그곳은 드립만 판매하는 곳이었다. 케냐니 뭐니 제대로 아는 원두 하나 없었지만 그냥 저게 저렇다고 하니 저걸 마시고 이게 이렇다니 이걸 마셨다. 확실한 건 원두에 따라 향과 풍미가 달라진다는 것 정도는 체감했다는 것.
신기했고, 신기했다. 그냥 그 정도. 당장 밥 벌어 먹기 힘든 상황이었고 매일이 분주했으며 피곤했다.
드립커피 입문
그러던 내가 왜 드립커피에 입문하냐고? 상대적으로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 정도는 어떻게 가능한 지경에 있거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여전히 허덕이지만 그럼에도 '훨씬' 안정적이니까.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어졌다는 단순한 이유도 있다. 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하루에도 몇 잔씩 내려마시지만, 이제 그 탄 맛이 슬슬 질린달까.
또 드립커피를 내리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이 부담과 낭비로 여겨지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 내가 그 시간을 교제의 장으로 바꾸고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번째 고민: 핸드밀이냐 전동밀이냐
드립커피에 입문하면서 드립세트를 구비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갖게 된 첫 번째 고민은 원두 그라인더에 대한 것이다. 핸드밀을 살 거냐, 전동밀을 살 거냐의 문제.
이 고민을 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딱 하나다. 가성비를 따져야 하기 때문. 돈은 있지만 입문하는 단계에서 내가 얼마나 더 활용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가성비를 따진다.
그렇다고 무조건 싼 거에 좋은 성능을 말하려는 건 아니고, 나한테 주어진 상황에 맞는 최고의 가성비가 뭐냐를 고민하는 거다. 일단 커피를 내리게 될 때 놓인 상황은 대략 이렇다.
- 대상: 대략 15-20명 (단회적이진 않고 순차적으로 마주하게 될 대상들이며, 때로는 한 번에 4-6명씩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음)
- 커피를 내리는 장소가 불규칙적: 전자설비가 부재한 곳일 가능성이 있음
- 합리적인 가격을 원함.
생각의 흐름
처음에는 무조건 전동밀로 구매하려고 했다. 일단 대상이 15명 정도가 될 수 있는데, 커피를 종종 내려주던 친구의 말로는 4명만 돼도 핸드밀로는 부담이 된다는 거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핸드밀은 꽤나 불편해보이고 힘들어보인다. 그 갬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5만 원 미만의 전동밀을 구매하려고 하니 선택지의 제한이 생긴다는 거다. 내 생각과 조사의 흐름은 이렇게 흘러갔다.
1. 무선 전동밀을 구매해야지
일단 무선 전동밀을 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앞서 말한 환경이 일정하지 않고 전자설비가 없는 공간이 분명히 있을 거기 때문에. 유튜브로 시장조사를 하던 중 무선 전동밀로 추천이 많이 올라오는 제품 하나를 발견했다. 펀캐스트라 라는 무선전동밀.
일단 성능이 좋았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용량이 엄청 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원두를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가는 도중 원두가 걸리면 잠깐 반대편으로 날이 움직였다가 조정한 후 다시 가는 듯한 기능도 들어 있었다. 무선 전동밀의 품질 차이를 결정하는 게 그런 성능이더라. 원두가 걸렸을 때 그대로 멈추고 버벅이냐 아니면 움직임을 자동으로 만들어 다시 갈기 시작할 것인가.
또 휴대성도 좋다. 작고 단단한 물건처럼 보였다. 충전도 usb-c타입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이 정도면 최고이지 않나.
문제는 가격이 17만 원대라는 거다. 17만 원? 바로 생각을 바꿨다.
2. 5만 원 미만의 무선 전동밀을 구매해야지
목표를 바꿨다. 전동밀이긴 한데 5만 원 밑으로 구매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5만 원 밑으로 무선 전동밀을 사야겠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대략 두 가지 제품이 선택지로 등장했다. 하나는 빈스업 커피 그라인더였고, 다른 하나는 마리슈타이거 루미 그라인더였다.
둘 다 조금 투박했다.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래도 무선이고 전동밀이니까. 가격도 17만 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많이 저렴하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1) 원두 분쇄가 느리다. 2) 한 번에 갈 수 있는 원두의 양이 적다. 1+2 = 한 번 원두를 내리려면 오래 내려도 적은 양만 나온다. 3) 만약 원두를 분쇄하는 도중 걸리면 버벅이거나 멈춰버리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1+2+3 = 한 번 원두를 내리려면 오래 갈아도 적은 양만 나오는데, 그마저도 안 보고 있다가 원두가 걸리면 그대로 멈춰버린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3. 5만 원 미만의 유선 전동밀을 구매해야지
확실히 유선은 무선에 비해 전력량과 파워가 높았다. 유선 전동밀은 확실히 성능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중에는 용량도 꽤 많이 갈리고 분쇄 과정 자체에서 퍼포먼스도 어느 정도 가지고 가는 제품들이 꽤 있었다.
문제는 일단 유선이라는 거다. 내가 전기가 없는 데서 커피를 내릴 수도 있다. 이건 캠핑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캠핑을 가서도 사용해야 했지만, 더 본질적으로 내가 주로 커피를 내리고 커피를 통해 교제하는 이들을 만날 장소가 어디일지 나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생각을 바꿨다.
4. 싼 핸드밀로 고생하자
처음부터 이럴 걸. 내가 핸드밀 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아내가 그거 엄청 힘들 텐데 괜찮겠냐고 걱정했다. 하지만 이 생각의 흐름을 공유했을 때 17만 원에 놀라고, 적당한 전동밀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으며, 안타깝지만 핸드밀을 구매하는 것을 만류할 수 없었다.
일단 그냥 핸드밀로 고생하려고 한다.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17만 원 어치의 핸드드립을 내려먹을 자신이 있었으면 모르는데, 한 번도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17만 원은 투자하기에 좀 아까운 돈이다.
칼리타 핸드밀 KH-3
싼 핸드밀을 사자 결심하고 내가 결국 구매한 핸드밀은 칼리타 핸드밀 KH-3이었다.
오늘 결제를 해서 도착을 안 했기에 직접 찍어서 올릴 사진이 없다. 어쨌든. 이거 거의 국민 핸드밀 아닌가.
사실 드립세트 검색하면 제일 유명하고 보편적인게 칼리타 드립세트다. 드립서버부터 드립포트, 드리퍼까지 다 칼리타로 맞추는 게 초심자에게는 당연한 것.
이럴 거면 그냥 싹 다 칼리타로 맞출 걸. 괜히 머리싸매고 고민했다. 드립포트는 다른 데서 샀는데. 뭐 어차피 구비한 드리퍼 자체가 이미 스탠리라는 브랜드의 것이기 때문에 칼리타 통일은 불가능한 셈이니 아쉬워하지 말까나.
뭐 도착을 하고 사용을 해봐야 내가 얼마나 큰 고생거리를 샀는지 알겠지만, 일단은 내 고민의 기록을 남기고 공유하는 게 목적이니까. 칼리타 핸드밀도 제조국가에 따라서 나무 색상도 다르고 그렇다던데, 나는 29cm에서 드립서버랑 같이 묶어서 사다보니 제조국 생각 거의 안 하고 있는 그대로 샀다.
과연 얼마나 힘들까, 잘 사용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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